기념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 고씨삼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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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씨삼강문은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전투에서 순국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선생을 비롯한 그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로 7명이 표장되어 있다.
1충은 고경명, 3효는 그의 장남 종후(從厚), 차남 인후(因厚), 손자 부금(傅金) 이며, 2열은 그의 딸 노상룡(盧尙龍)의 처와 질부인 거후(居厚)의 처 광산정씨(光山鄭氏)이고 1절은 그의 동생 경형(敬兄)이다. 이들은 1595년에 고경명과 경형, 종후, 인후가 정려되었으며, 1597년에는 노상룡의 처 고씨가 정려되었고, 1655년 부금이 정려되었으며, 1844년에 거후의 처 광산정씨가 포함되었다.
충렬공(忠烈公) 고경명(1533∼1592년)은 압촌동에서 대사간(大司諫) 맹영(孟英)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제봉(霽俸),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명종 12년(155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1년 동래부사(東萊府使)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차남 의열공(義烈公) 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금산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아버지와 동생을 잃었다.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부르고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양산숙(梁山璹) 등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성이 무너지자 이들 의병장들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열녀는 그의 딸 영광 유생 노상룡의 처와 그의 질부인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로 이들은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붙잡히자 자결하여 절개를 지켰다. 그 외에 효자로 그의 손자인 선교랑(宣敎郞) 부금과 절의(節義)로 죽은 동생 경형 등 일가 7명이 모셔져 있다. 현존 건물은 1844년에 세운 것으로 사방에 홍살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차단하고 앞 뒤 2열로 정려현판(旌閭懸板)을 걸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붕은 부연(附緣)이 없는 홑처마로 처리했다. 건물 밖에는 담장을 돌리고 외삼문(外三門)을 세웠으며 삼강문 옆에는 고씨 문중의 제각인 추원각(追遠閣)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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