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에 위치한 덕림사(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말사) 명부전에는 지장보살 삼존상을 비롯하여 총 31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중 지장보살사을 포함한 26구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이 상(像)들은 원래 전남 화순군 남면 장천리 오룡마을에 위치한 영봉사(靈鳳寺)에 1680년 봉안되었던 불상으로 조선후기에 절이 폐사되면서 화순군 모악산 유마사를 거쳐 보성군 죽산리에 있는 대원사에 안치된 것을 1945년에서 1946년사이에 광주시 남구 월산동 소재 덕림사로 옮겨왔다고 한다.덕림사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은 1680년 수은이 화주가 되고 , 색난과 그 제자들이 조성하여 시찰에 봉안한 신앙대상물로써 조성연대와 화주 및 조각승이 밝혀진 점과 독림된 전각에 모셔지는 명부신앙의 초기자료란 점에서 한국불교 미술사 및 신앙연구의 소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규모① 지장보살상 : 총높이 98cm, 머리높이 32cm, 어깨폭 49cm, 무릎폭 69cm, 무릎높이 20.5cm② 시 왕 상 : 총높이 154cm 전후③ 도명존자상 : 총높이 128cm④동 자 상 : 총높이 53cm전후
관리자 16-12-27 조회1951
오웬기념각은 벨(Rev.Eugene Bell, D.D/ 한국명 배유지(裵裕趾, 1868-1925)) 목사와 함께 전남최초의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오웬(M.D.Clement Carrington Owen/ 한국명 오기원(吳基元, 1867-1909))과 그의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양옥 건물이다. 오웬은 생전에 할아버지의 기념각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추진하기 전에 순교하였다. 그가 죽은 뒤 미국의 친지들이 성금을 모아 보내와 그와 할아버지의 기념각을 지었다. 이 때문에 대리석 현판에는 " IN MEMORY OF WILLAM L. AND CLEMENT C. OWEN. 오기면급기조율렴지기념각(吳基冕及其祖聿廉之紀念閣)"이라 쓰여 있다.이 건물은 회색벽돌을 네델란드식으로 쌓아 벽을 만들고, 내부에 나무기둥을 세워 목재 지붕틀을 받쳤다. 평면형태는 정방형이지만 내부구조가 모서리에 위치한 설교단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하고, 설교단의 반대편은 2층으로 되어있다. 바닥은 설교단을 향하여 약간 경사져 있다. 건물이 예배나 집회의 장소로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어 교회로 사용된 적도 있으며 다양한 집회를 하였다.특히 이곳은 개화기 광주 신문화의 발상지라고 할만큼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이곳에서 베풀어졌으며, 이곳을 통하여 이 고장의 문화운동이 파급되어 갔다.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집회는 물론 강연회, 음악회, 영화, 연극, 무용, 학교나 유치원의 학예회 졸업식 등을 이곳에서 함으로써 오웬기념각은 지역의 공회당 기능을 겸한 문화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관리자 16-12-27 조회2315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종손가(宗孫家) 소장(所藏) 고문서(古文書)와 전적(典籍)은 고봉선생(高峰先生)의 친필서간(親筆書簡)과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친필서간이 같이 합쳐진 왕복서(往復書)와 고봉가계(高峰家係)의 분재기(分財記)인 화회문기류(和會文記類) 등 7종(鍾) 18점(點)이 소장(所藏)되어 있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1572년)은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1588년(명종13)에 문과에 급제, 승정원(承政院), 부정자(副正字) 벼슬을 시작으로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그만두고 귀향도중 병을 얻어 전북 고부(全北 古阜)에서 운명하였다. 고봉선생은 이퇴계와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論)한 왕복서간(往復書簡)을 8년간 계속하였을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퇴계는 고봉의 이론을 자주 수용했다고 하며, 퇴계문하에 뛰어난 제자들이 많았으나 도학(道學)을 이을자는 오직 고봉(高峰)을 첫째로 꼽았다.기대승(奇大升) 종손가(宗孫家) 소장(所藏) 문적(文籍)의 내용과 목록은 다음과 같다.1) 분재기(分財記) 3점(點)재산상속문서(財産相續文書)로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해준 내용을 기록한 것. 첩장(帖裝)으로 되었으며 화회문기(和會文記) 2점, 별급문기(別給文記) 1점이다.2) 전적(典籍)3권(券)으로 1572년(선조5)에 고봉(高峰)이 필사(筆寫)한 「도산기(陶山記)」와 도산기(陶山記)에 대한 화운 18수首(와) 함께 발문(跋文)(1570년)을 지어 첩(帖)으로 된 고봉(高峰)의 친필유묵(親筆遺墨)이다.3) 명문(明文)전답(田畓), 가옥(家屋), 노비(奴婢) 등의 매매문서(賣買文書)로 모두 6건(件)이다.4) 시권(試券)문(文)&Middot;무(武)&Middot;잡과(雜科) 등 대(大)&Middot;소(小)&Middot;제과(諸科)의 시지(試紙)인데 모두 3점이다.5) 상소문(上疏文)상언(上言)은 국왕(國王)에게 올리는 문서(文書)로 상소(上疏)의 일종(一種)이나 양식(樣式)에 있어서 조금 차이가 있다. 이 상언(上言)은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기언관(奇彦觀)이 75세의 나이로 관직 사양을 청하는 내용이다.6) 호구단자(戶口單子)호구단자(戶口單子)는 호주(戶主)가 호구상황(戶口狀況)을 작성(作成)하여 관청(官廳)에 제출(提出)하는 문서(文書)로 오늘날의 호적신고서(戶籍申告書)이다. 기재(記載)되는 내용(內容)은 호주(戶主)의 이름, 나이, 본관, 호주와 처의 사조(四祖)(부(父)&Middot;조(祖)&Middot;증조(曾祖)&Middot;외조(外祖)), 소유한 노비다. 기씨종가(奇氏宗家)의 호구단자는 고봉선생의 4대손(代孫)인 진설(震說)의 것이다.7) 관문(關門)관문(關門)은 동등한 관부(官府) 상호간(相互間) 또는 상부관청(上部官廳)에서 하부관청(下部官廳)에 발급하는 공문(公文)으로 기씨종가(奇氏宗家)의 것은 충훈부(忠勳府)에서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에게 고봉(高峰)의 묘소산직수호인(墓所山直守護人)에게 잡역(雜役)을 면제(免除)하도록 하는 내용의 문서이다.
관리자 16-12-27 조회1661
포충사(褒忠祠)에는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그의 아들 그리고 포충사와 관련된 문적(文籍) 9점이 소장되어 있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년)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자(字)는 이순(而順) 호(號)는 제봉(霽峰) 또는 태헌(笞軒), 시호(諡號)는 충렬공(忠烈公)이다. 1588년 문과에 장원(壯元)하여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으로 관직에 들어가 17곳의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59세에 동래부사를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있을 때 바로 이듬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錦山)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문장(文章)과 글씨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제봉집(霽峰集)이 있다. 1601년 나라에서 사우(祠宇)를 세우고 포충사(褒忠祠)라 사액(賜額)하고 당시 포충사와 관련된 제위답(祭位畓) 빙납명문(氷納明文)과 수직노영납명문(守直奴永納明文)이 내리니 포충사 관리에 소중한 자료이다. 또, 입안(立案) 문서(文書)는 충효지가(忠孝之家)에 대한 국가의 예우(禮遇)가 어떠 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며, 교지(敎旨) 역시 그 공적(功績)을 인정(認定) 추증(追贈)하는 제도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제봉의 친필(親筆) 유묵(遺墨)은 제봉선생님의 정신(精神)이 스며있는 귀중한 자료인데 문적일록(文籍日錄)은 다음과 같다. ○문적해제(文籍解題)1) 명문(明文)…제봉의 부인과 아들이 포충사의 관리를 위해 논 12두락(斗落)과 노비(奴婢)를 기증(寄贈)한 것은 나라에서 포충사를 세우고 춘추(春秋)로 제향(祭亨)을 올리도록 하며 사액(賜額)까지 내려주시니 자손(子孫)된자의 감사(感謝)한 마음으로 전답(田畓)과 노비(奴婢)를 영납(永納)한 내용으로 그 예(例)가 드문 일이다.2) 입안문(立案文)…전답(田畓), 노비(奴婢)의 매매(賣買) 때 관청(官廳)으로부터 인가받는 증명서이나 여기에는 매매인정서가 아니고 복호입안문(復戶立案文)으로 국가(國家)가 호(戶)에 부과하는 요역부담(遙役負擔)을 감면(減免)하거나 면제(免除)해 주던 제도로 행적(行蹟)이 뛰어난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에 혜택을 주는 복호(復戶)로 5결(結)을 복호(復戶)한 내용인데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확인(確認)한 입안문(立案文)이다.3) 교지(敎旨)…모두 4장으로 제봉의 것이 2매 그 아들의 것이 각 1매인데, 그 내용은 고경명이 가정(嘉靖) 37년 (1588)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한 홍패교지(紅牌敎旨)와 숭덕(崇德) 8년(1643)에 충렬공(忠烈公) 시호(諡號)를 내린 증익교지(贈益敎旨)가 있고, 숭정(崇禎) 2년(1629)에 고인후(高因厚)에게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증직(贈職)한 것과 고인후(高因厚)에게 강희(康熙) 2년(1688)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贈職)한 교지(敎旨)들이다.4) 유묵(遺墨)…제봉의 수초격문(手草檄文)과 세독충정(世篤忠貞)의 휘호(揮毫)가 전한다. 세독충정(世篤忠貞)은 연대(年代)를 알 수 없이 액자로 보존되고 있으며 수초격문(手草檄文)은 후손(後孫)에 의해 작첩(作帖)한 것인데 앞부분에 수초격문(手草檄文)이 있고 다음에 아들 고용후(高用厚)의 친필(親筆)(1630년)을 위시하여 신익성(申翊聖)의 친필(親筆)(1641년)과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친필(親筆)(1678년), 담운(澹雲) 조명교(曺命敎)의 친필(親筆)(1740년), 그리고 조현명(曺顯命)의 친필(親筆)(1744년)등 6인의 필적(筆跡)이 15장으로 작첩(作帖)되어 있다. 이는 정기록(正氣錄)을 만들 때 받은 서발(序跋)들이다.
관리자 16-12-27 조회1953
제봉문집(霽峰文集) 목판(木版)은 그의 막내아들 고용후(高用厚) 광해 9년 (1617)에 남원부사로 자원해 가서 그 해에 남원지역의 부호들로부터 판각에 필요한 재원을 기부받아 모두 481판을 제작하였다. 재질은 박달나무로 양면 판각인데 크기는 3종류로서 가로세로의 길이가 27×16㎝, 33×18.5㎝,33×21.6㎝이며 대부과분 詩集이다. 시집 외 정기록(正氣錄)과 유서석록(遊瑞石綠), 제하휘록(濟下彙錄), 霽峰年譜(제봉연보), 포충사지(褒忠祠誌)가 있다. 이 목판은 눌제(訥霽), 사암(思庵), 고제목판(高霽木版)과 함께 17세기 개인 문집 목판으로서 목판인쇄의 기술사적 연구자료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재이다. 현재 목판(木版)은 포충사 입구 우측(右側) 정기관(正氣館)에 보관되어 있다. 판각의 제목을 간략하게 적으면 다음과 같다.1) 제봉문집(霽峰文集)과 속집(續集) 및 유집(遺集)이 문집은 제봉이 전장으로 떠날 때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어린 막내아들 고용후에게 자신의 시문집(詩文集)을 잘 간직해 달리는 말을 하였다. 고용후는 어지러운 전란의 피난길에서도 이 문집만은 꼭 지니고 다녔다가 나라가 평정된 후 남원부사로 왔으므로 부친의 문집을 간행하여 세상에 전하였다. 문집은 1권 1책으로 되었으나 곧 속집이 1권 1책이요 유집(遺集)이 1권 1책이며, 본 문집에는 백사 이항복과 서경(西坰) 유근(柳根)선생, 명나라 예부주객장응회(禮部主客莊應會)의 서문이 실려있다.2) 서석록(瑞石錄)제봉의 나이 42세 되던 해(선조 7년. 1574) 4월 20일 광주목사 갈천(葛川) 임훈(林薰)의 초청으로 지금의 무등산인 서석산에 오른 등산기행문(登山紀行文)이다.3) 정기록(正氣錄)임진란 때에 순절한 충렬공 제봉 고경명과 장남 효열공(孝烈公) 집봉(集峯) 종후(從厚), 차남 효열공(孝烈公) 학봉(鶴峯) 인후(因厚) 삼부자(三父子)의 충효정신(忠孝精神), 그리고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4) 제하휘록(霽下彙錄)제봉의 7대손 임연제(臨淵霽) 시민(時民)이 제봉의 년보를 편찬하면서 국사책과 야사(野史), 선현문집(先賢文集)을 보고 고씨일문(高氏一門)에 관계되는 여러 사실과 문적(文籍)을 가려내어 편집하고 약간의 서(序), 발(跋), 사액치제문, 사제문, 시장, 제문, 만사, 행장, 유사, 묘갈 등을 보태어 성책(成冊)한 것이다.5) 제봉년보(霽峰年譜)이 연보는 제봉의 7대손 임연제(臨淵霽) 시민(時民)이 편찬한 것으로 권두에 세계록(世系錄)이 있고 다음에 일문삼강도(一門三綱圖)와 삼숙질거의도(三叔姪擧義圖)가 있다. 이 삼강도와 거의도에 의하면 충노(忠奴) 2명을 합쳐서 고씨일문(高氏一門)에 9명의 순절사가 있는셈이며, 그 후 의거에 참여한 분이 3명이나 되었다. 연보는 편년(編年)체로서 제봉이 태어난 중종 28년부터 임진년 7월 10일 순절할 때까지의 편년기록과 그 후에 이어 반장(返葬)기록, 부조(不?)기록, 족여(族閭)기록, 사제(賜祭)기록이 있고 효렬공, 의렬공의 순절과 딸인 노씨(盧氏)부인과 질녀 안씨(安氏) 부인의 순절 기록이 있고, 또 포충사 건사기록, 신도비, 제봉문집, 정기록, 서석록의 편찬 간행기록과 연보 및 제하휘록의 편찬간행 기록 등 1963년까지의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6) 포충사지(褒忠祠誌)광주 제봉산 기슭에 있는 사액사당(賜額祠堂)으로 제봉과 그의 두 아들 효렬공, 의렬공, 그리고 월파(月坡) 유팽노(柳彭老)와 청계(淸溪) 안영(安瑛)을 봉안한 곳이다. 이 포충사지는 포충사가 세워진 경위와 창건목적, 세운 분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고 그 후 포충사에 관한 모든 문헌과 운용사항이 기록되어 있으며, 역대 원장(院長)과 제임(霽任)들의 명단, 부속건물에 관한 기문(記文), 상량문(上樑文), 봉안문(奉安文)이 수록되어 있다. 상하 2권 1책으로 하권 말에 부록(附錄), 보유(補遺)가 붙어 있고 원본은 1959년 기해본으로 한적연활자본(漢籍沿活字本)이다.
관리자 16-12-27 조회1805
신라말의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을 배향(配享)하고 있는 사우(祠宇)이다. 1737년(영조(英祖) 13년)에 이 곳에 영당(影堂)을 세우고 고운(孤雲)선생의 영정을 봉안하다가 1846년(헌종(憲宗) 12년) 지산재(芝山齋)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1886년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書院撤廢) 때 훼철(毁撤) 되었다가 1922년 다시 현 사우(祠宇)를 건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곳에는 지산재(芝山齋)(강당(講堂))와 내외삼문(內外三門), 영당(影堂) 등이 있는데 문화재(文化財)로 지정(指定)된 것은 지산재(芝山齋) 1동(棟)이다. 이 건물은 정면(正面) 4칸 , 측면(側面) 1칸, 팔작(八作)지붕인데 중앙(中央) 3칸은 마루바닥이고 양퇴간(兩退間)은 방을 놓아 흡사 일반 민가와 같은 인상을 준다. 지산재(芝山齋)의 편액(篇額)은 고당(顧堂) 김규태(金奎泰)의 글씨이며, 1985년 건물좌편 공지에 새로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당초(當初) 배향(配享)된 인물은 최치원(崔致遠)선생을 주벽으로 한 최운한(崔雲漢), 최형한(崔亨漢), 정오도(鄭吾道) 등 4위(位)였으나. 1922년(年) 復設(부설)하면서 고운선생(孤雲先生)만 배향(配享)하였다.▲ 최치원(崔致遠 ; 857∼?) :신라말의 대학자이며 호(號)는 고운(孤雲), 익호(益號)는 문창후(文昌候)이고 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라 전한다. 12세 때 당(唐)에 유학, 17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담수현위(宣州潭水縣尉),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을 역임하였다. 황소(黃巢)의 난(亂) 때 격문을 써서 이름이 높았으며 884년(27세)에 귀국하였다. 시무(時務) 10여조(余條)를 써 올려 아손(阿飡)이 되었으나 난세(亂世)가 되자 전국을 돌며 풍월을 읊다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한다. 저서에 사육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있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최운한(崔雲漢 ; 1444∼1499년) :호(號)는 고암(苽庵),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생원(生員) 영원(永源)의 장남(長男)이다. 점필재( 畢齋)의 문하(門下)에서 세조(世祖)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수학(修學)한 후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에 뽑혔다. 그러나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고향인 양과동(良苽洞)에서 부모를 봉양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3년을 시묘(侍墓)하여 효자(孝子)에 천거되었다.▲ 최형한(崔亨漢 ; 1446∼1504) :자(字)는 탁경(卓卿), 호(號)는 영사정(永思亭)이며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생원(生員) 영원(永源)의 아들로 1480년 (성종(成宗) 11년) 진사가 되고 148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교서(典校署)의 정자(正字)가 되었으니 다음 해에 병으로 사임했다. 이어 1498년 재등용되어 헌납(獻納), 장령(掌令), 영암군수(靈巖郡守) 등을 역임하였으나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궁궐앞에서 대죄(待罪)하다 9일만에 굶어 죽었다. 김일손(金馹孫), 성현(成俔) 등과 교의(交誼)가 두터웠다.▲ 정오도(鄭吾道 ; 1641∼1732년):자(字)는 일관(一貫), 호(號)는 약포(藥圃)이며 증좌승지(贈左承旨)의 아들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문하(門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으나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이 유배(流配)되고 성혼(成渾), 이이(李珥) 등이 출출(出黜) 됨을 보고 향리에 돌아와 동계(洞契)을 창설하고 향약(鄕約)을 제정하는 등 향리(鄕里)의 문화발전(文化發展)에 힘썼다. 1710년 학행(學行)에 천거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고 1727년 통정대부(通政大未)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제수 받았다.
관리자 16-12-27 조회2132
구동(龜洞) 광주공원과 사동(社洞)사이에 있다. 건축물의 초창시기(初創時期)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 태조 1년(1392년)에 각도의 안찰사(按察使)에게 교학의 쇄신을 명한 것을 계기로 대부분의 향교가 세워졌던 사실로 미루어 이 무렵에 세워졌을 것 으로 추측된다. 향교의 본 위치는 장원봉(壯元峰) 아래에 있었으나 호환(虎患)이 심하여 성(城) 안으로 옮겼다. 그러나 저습한 데다 좁고 퇴락하여 1488년에 현 위치로 다시 옮겨 지었다. 당시의 향교 이건사적(移建史蹟)은 성종(成宗) 때의 문공(文臣) 성현(成俔)이 자세히 써서 남겼는데 역사(役事)가 시작되자 서민들이 자신들의 일처럼 서둘러 부역하여 수개월만에 일을 마쳤다고 전하며, 특히 현감(縣監) 권수평(權守平)이 많은 재화(私財)를 희사하여 향교의 논밭을 사고 경서(經書)들을 마련하자 이에 감격한 감사(監司) 이숙감(李叔減), 도사(都事) 정탁(鄭鐸)도 비용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 때 완성된 건물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건물현황① 대성전(大成殿) :정면(正面) 3칸, 측면(側面) 3칸, 맞배지붕이며, 전면(前面) 1칸은 퇴간(退間)으로 개방했다. 다듬은 돌로 높게 쌓은 축대 위에 다시 기단을 돌리고 막돌로 초석을 놓았다. 공포(拱包)는 주심포계(柱心包系)의 이익공양식(二翼工樣式)이다.② 명륜당(明倫堂) :정면(正面) 8칸, 측면(側面) 2칸, 맞배지붕의 단층강당으로 맨 우측(右側) 정면(正面) 1칸, 측면(側面) 2칸은 온돌방으로 꾸미고 나머지는 넓은 대청으로 구성하였다.③ 동·서무(東·西?) :동무(東?)와 서무(西?)는 각각 정면(正面) 2칸, 측면(側面) 1칸반(半)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前面) 반칸(半間)을 퇴간(退間)으로 개방했다.④ 동·서재(東·西齋) :동재(東齋)는 정면(正面) 3칸, 서재(西齋)는 정면(正面) 4칸이고 측면(側面)은 모두 1칸반(半)씩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동·서재(東·西齋) 모두 전면(前面) 반(半)칸은 툇마루이며 그 안에 온돌방을 꾸몄다.⑤ 내삼문(內三門) :정면(正面) 3칸, 측면(側面) 1칸인 맞배지붕의 평대문(平大門)이다. 막돌초석 위에 원주(圓柱)를 세운 삼량가(三樑架)의 이익공(二翼工) 양식이다.⑥ 외삼문(外三門) :정면(正面) 3칸, 측면(側面) 1칸의 평대문(平大門)이며 다듬은 원형(圓形)초석 위에 원주(圓柱)를 세웠다.⑦ 문회재(文會齋) :정면(正面) 3칸, 측면(側面) 3칸의 팔작집. 화강암 바른층 쌓기의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주(圓柱)를 세운 오량가(五樑架)의 이익공(二翼工)양식이다. 천장은 宗樑 위로만 우물 천장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연등 천장으로 꾸몄다.⑧ 양사재(養士齋) :ㄱ자형(字形)으로 된 팔작집으로 양식(樣式)은 초익공(初翼工)식이다.광주학교의 제향일(祭享日)은 춘추(春秋) 2회이며 음력 2월 상정일(上丁日)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집전한다.
관리자 16-12-27 조회2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