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물은 광주 근대사학의 효시인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가 당시 학교 인가를 목적으로 1928년에 신축한 소강당으로 광주에 남아 있는 체육시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1945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교사(校舍)로도 사용한바 있다.붉은 벽돌로 건축되었으며, 독특한 박공지붕(지붕면이 양쪽 방향으로 경사진 ㅅ자 모양의 지붕), 왕대공 트러스(큰 외부하중을 지지하는, 긴 기둥간격을 가진 구조물)인 산형구조물의 중앙에 수직재가 있는 구조물 등은 당시의 건축 양식과 기술을 후세에 전하는 중요한 건축물로서 가치가 높다.
관리자 16-12-27 조회2147
양과동계는 1451년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받아 실시된 광주향약의 영향을 받아 홍치년간(弘治年間 1488∼1505년)에 이루어진 동약이다. 특히 광주향약을 발의한 이선제(李先齊 1389∼1454년)가 이 마을 출신이며, 초기의 좌목(座目)에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어 화를 당했던 이발(李潑 1544∼1589:이선제의 5대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선제와 연관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동약이 중수된 것은 임진왜란 후인 1604년으로 중수에 관여한 유사경(柳思敬)은 동적입의서(洞籍立議序)에서 홍치년간의 동약이 100여년간 잘 운영되다가 중간에 약간 해이해졌으며,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그 필요성이 커져 중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중수 이후 기본적인 틀을 잃지 않고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1604년에 작성된 중수조목(重修條目)을 살펴보면,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원용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 동약들과 대개 비슷하며, 벌칙과 세부 지행규칙인 별규(別規)에서 개성을 살필 수 있다. 양과동 동약은 모두 4권의 좌목이 있는데, 이것은 동계원의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중요한 마을사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좌목은 옛날 것을 일괄 정리하여 동계에 가입한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어 각 시기의 동계원 구성자료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의 성시 구성원이 현재와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마을에 보관된 문과안(文科案)과 사마안(司馬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동계의 조목 중 이의 실시를 30리로 한정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동계의 범위를 한정한 것으로 여러 마을을 하나의 공동체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786년 동각(洞閣)을 중수하면서 작성한 물자수합록(物資收合錄)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 동답기(洞沓記)와 완의(完議)는 동약의 물적기반인 사회경제적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동장(洞長)과 공사원(工事員), 유사(有司) 등의 동약 조직과 소속 전답을 적고 있다. 동약이 별도의 부세와 관련된 경제력까지 간여하고 있어 상부상조의 기능을 넘어 보다 큰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외에 동향약(洞鄕約)과 양과정중수기, 경오인일운(庚午人日韻), 양과정현판시문, 수조안(收租案), 상서문(上書文) 등이 있다.
관리자 16-12-27 조회1519
이들 유적은 돌머리라 불리는 표고 20∼30m의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하고 있으며, 구릉정상부를 경계로 마을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지역이다. 이 일대는 영산강 지류인 대촌천(大村川)의 상류에 해당하는 곳으로 취락지 형성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1977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임암동 주거지(집자리)는 일부 유실되었으나,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으로 지름 4.3m, 면적 14.86㎡이다. 내부구조는 북벽 가까이에 감실(龕室)이 있으며, 중앙과 남북에 각 2개의 기둥이 있는데 남북 기둥 구멍은 대칭이다. 주거지 남쪽에는 33∼80cm 너비의 입구가 있으며, 중앙에는 갈돌이 놓여있다. 중앙 기둥 구멍과 북벽 사이에 타원형의 화덕자리(爐址)가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무문토기가 집중 분포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기둥 구멍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갈돌, 화덕, 대석(臺石) 등이 있어 중심부에 부엌이 있었던 것 같고, 동남쪽에는 숫돌과 석재편 등이 있어 도구 제작처로 추정된다. 기둥 구멍으로 보아 원형의 직립벽에 원추형 지붕을 씌운 형태로 생각된다.원산동 주거지의 형태는 모가 죽은 장방향으로 동쪽부분이 산사태로 대부분 유실되어 남아 있는 크기는 남북 1.9m, 동서 2.3m이다. 기둥 구멍은 벽을 따라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지붕의 형태는 우진각으로 추정된다. 주거지 내부에는 유물이 없으며 주변에서 많은 석재편이 출토되었다.석관묘는 원산동 주거지 부근에서 석실과 일부 천장석을 갖춘 채 확인되었다. 동서 장축의 무덤방(石室)은 동서 길이 1.8m, 남북 너비 75∼80cm, 깊이 70cm로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무덤방의 동벽은 1매의 길고 큰 돌로 축조하였고 남북벽은 깬돌을 쌓아 구성하였다. 무덤방 바닥은 자연암반을 깍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2∼3매의 천장석을 덮었다. 유물은 철촉과 관못, 관장식이 있으며, 관못의 위치로 보아 나무관은 길이 150cm, 너비 70cm로 추정된다. 무덤방 구조로 보아 삼국시대 수혈식(竪穴式)석실분으로 보인다.
관리자 16-12-27 조회1657
부용정은 고려말 조선초에 활동한 金文發(1359∼1418)이 지은 정자로 평야가 펼쳐져 있는 평지에 2단으로 대지를 고른 후 건립되었다. 정자의 이름은 연(蓮)을 꽃 중의 군자(君子)라고 칭송하였던 북송(北宋) 주돈이(周敦 )의 애련설(愛蓮設)에 담긴 뜻을 취하여 지었다. 김문발은 본관은 광산, 호가 부용(芙蓉)으로 고려말 조선초에 왜적을 물리친 공이 매우 크며 전라감사(全羅監司),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형조참판(刑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418년(태종 18년) 낙향하여 여씨(呂氏)의 남전향약(南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모방하여 풍속 교화에 힘썼는데, 이것이 광주 향약좌목(鄕約座目)의 유래가 되었다. 따라서 이 정자는 광주지역 향약의 시행장소로 매우 유서가 깊은 곳이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이시원(李始元), 노자정(盧自亭) 등과 학문을 논하고 시를 읊기도 하였다.건물은 정·측면 다같이 3칸으로 기둥머리에 공포가 없는 민도리집이다. 우물마루를 깐 맞배지붕으로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홑처마이다. 기단은 네모 막돌 바른층 쌓기를 하였으며, 좌우 가운데를 제외하고는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았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을 하였고 연골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이곳에는 부용정 현판과 양응정(梁應鼎), 고경명(高敬命), 이안눌(李安訥), 박제형(朴濟珩) 등 후대 명유(名儒)들의 누정제영(樓亭題詠)을 새긴 편액이 많이 걸려 있다. 정자 주변에는 칠석(漆石)마을 고싸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 전수관과 부용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기념물 제 10호)가 있고, 부용정의 내력이 쓰인 부용정석비(芙蓉亭石碑 1984년 건립)가 있다.
관리자 16-12-27 조회1243
이 정자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마을 동산에 있으며, 다른 이름은 간원대(諫院臺) 또는 고경명(高景命)의 별서(別墅)라고도 한다. 간원대는 이곳 출신들이 간관(諫官)으로 많이 배출되어 여기에서 국사를 의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동약(洞約)과 향약(鄕約) 등의 시행처로도 사용되었다. 삼한 또는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나 여러차례의 중수가 있었고, 뚜렷한 자료가 없어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정자의 제액(題額)은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이 쓴 것이다. 정자 내에는 동정입의서(洞亭立議序)와 중수기(重修記), 고경명의 제양과모정(題良苽茅亭), 박광옥(朴光玉)의 차유곡모정운(次柳谷茅亭韻), 제간원대(題諫院臺), 향약 등과 관계된 현판이 걸려 있다. 관련된 문서는 1648∼1889년에 작성된 동계좌목(東契座目) 2권과 상소문 5매가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바람 막는 판이 설치되어 있다. 기단은 바른층 막돌쌓기를 하고 덤벙주초를 놓고서 원형기둥을 세웠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천장은 연목(椽木)의 연골이 그대로 들어난 연등천장으로 하였으며, 홑처마이다. 또한 목재의 모양이나 기둥 상부에 S자형의 헛첨차만을 이룬 단순한 형태는 공포( 包)완성 바로 직전의 형태로, 이 정자가 오래된 구조물임을 알 수 있다. 기와의 문양은 숫막새는 날개를 펴고 있는 백조 문양이며, 암막새는 거북선 모양이다.
관리자 16-12-27 조회1218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옛 집터를 그 후손들이 여러차례 고쳐지은 집이다. 현존 가옥은 1917년 소유자 고원희(高元熙)의 부 종석(琮錫)이 건축한 것으로 옛집은 무너져 없어졌다. 예전에는 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대문과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이 남아 있다.대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곳간채가 나란히 있으며,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 안채 오른쪽에 사당이 있다.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앞뒤로 마루가 있는 팔작지붕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두벌대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앞 열은 원형, 그 외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원형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내부가구(架構)는 고주(高柱) 위에 큰대들보를 걸치고 판대공을 놓았으며, 그 뒤에 종도리를 놓았다. 평면은 좌로부터 1칸반의 부엌과 겹집형태로된 방, 2칸의 대청, 1칸의 방으로 되어있다. 창호는 전체가 양쪽ㄹ으로 열어지는 2분합문이며, 방은 겹문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넉살창(窓)이 있다. 숭정기원후 오갑정사 윤이월초 구일(崇禎紀元後 五甲丁巳 閏二月初 九日)이라는 상량문(上樑文)이 있어 1917년에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사당은 고경명장군과 그 아들 종후(從厚), 인후(因厚)형제의 부조묘(不 廟)이다.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앞에만 마루가 있으며 맞배지붕이다.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는 첨차형의 포(包)로 결합하였고, 초익공(初翼工) 위에는 용두(龍頭)를 빼내고 장혀와 굴도리를 얹었다. 내부가구는 큰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얹고 종보를 걸친 뒤 그위에 다시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얹었다. 문은 양쪽으로 열리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겹처마에 조잡한 모루 단청(丹靑)을 하고 있다. 건립시기는 안채보다 더 빠르다.
관리자 16-12-27 조회1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