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에 있는 왕버들로 높이가 약 15m 가량이며, 가슴높이의 직경은 약 1.7m 정도이다. 수관(樹冠)의 너비는 13m 내외로 수령은 약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필문 이선제(?門 李先齊 ; 1389 ∼ 1454)가 심었으며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쇄락해지리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선제의 후손들은 과거에 등제하게 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축하연을 열었기 때문에 괘고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589년 이선제의 5대손 이발(李潑)이 기축옥사(己丑獄死)로 일컬어지는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謀叛事件)에 연루되어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죽임을 당하자 나무가 말라죽기 시작하였다. 그후 이발의 억울함은 밝혀지게 되었고, 죽은지 300여년이 흐른 뒤에 다시 잎을 피워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선조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이 나무를 광산이씨문중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관리하고 있다.
관리자 16-12-27 조회1085
광주 사직공원이 있는 양림산 남쪽 기슭의 기독교 장로교 선교부 후원에 있다. 호랑가시나무는 전남 남해안과 제주 서해안에 주로 자생하고 있는 상록활엽소교목(常綠闊葉小喬木)이다. 변산반도(邊山半島)가 북쪽 한계선이며 중국에도 분포하나 특히 전남의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잎은 두꺼운 가죽질이고 광택이 있으며 잎가에 가시 모양의 톱니 다섯개가 있다. 꽃은 여름철에 흰빛으로 잎 겨드랑이에 모여서 피며, 가을에 행과(核果)가 붉게 익는데, 겨울철에 눈 속에서도 붉은 빛을 띠어 관상수로서 적격이다. 이 나무는 높이가 6m 정도이며 나무의 근원을 이루는 부분의 둘레가 1.15m로 이 수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큰 나무이다. 수관(樹冠)의 너비는 남북 7m, 동서 5m이며, 가슴 높이에서 두갈래로 갈라져 있다. 나무의 아래부분은 도로가 옆에 있어 잘라진 곳이 많으나 윗부분은 공모양을 이루어 건강한 편이다. 나무가 있는 이 곳은 1899년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 배유지(裵裕祉), 오원(吳元) 두사람이 목포에서 광주로 이주하여 전도를 시작하였던 본거지이다. 이들은 1907년에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崇一學校)를 설립하였으며, 1911년에는 제중병원(濟衆病院:지금의 기독교병원)을 세워 선교활동을 넓혀 갔다. 이런 이유로 이 일대의 구릉지는 대부분 장로교의 소유지가 되었다. 따라서 이 곳은 원래의 양림산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데, 이 나무도 원래 이 일대에서 야생으로 자란 것을 관상용으로 보호해 왔으며, 주변에는 아직도 어린 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다.
관리자 16-12-27 조회1283
양림산 기슭에 동향으로 세워진 2층의 회색 벽돌건물이다.건물의 평면은 정사각형으로 1층은 거실, 가족실, 다용도실, 부엌, 욕실이 있고, 2층은 사생활 공간으로 침실을 두었다. 지하층은 창고와 보일러실이 있다. 현관이 동향(東向)인 점은 한국의 전통적 방위관(方位觀)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10.6m, 측면 10.6m이다. 이 건물은 미국인 선교사 우일선(Wilson)에 의해 1920년대에 지어졌다고 전해올 뿐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광주에 남아 있는 양식(洋式)주택으로는 가장 오랜된 건물이다.구조를 보면 벽은 두께 55㎜의 회색 벽돌을 가지고 네델란드식으로 쌓았으며, 내부는 회반죽으로 마감을 하고 고막이부분은 화강석을 쌓아 처리하였다. 개구부(開口部)는 모두 반원의 아치형으로 만들었고 창대부분은 벽돌 마구리 세워 쌓기를 하였다. 창문은 외부는 열 개창, 내부는 오르내리창의 이중창(二重窓)으로 구성하였다. 1층과 2층을 구별하기 위하여 벽돌로 돌림띠를 두어 외벽에 변화를 주었다. 정면 현관의 기둥은 2B 두께(40여㎝)로 쌓아가다가 2층 바닥부분에서 4켜 내쌍기로 주두를 만들어 단조로움을 없앴다.
관리자 16-12-27 조회1559
고씨삼강문은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전투에서 순국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선생을 비롯한 그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로 7명이 표장되어 있다.1충은 고경명, 3효는 그의 장남 종후(從厚), 차남 인후(因厚), 손자 부금(傅金) 이며, 2열은 그의 딸 노상룡(盧尙龍)의 처와 질부인 거후(居厚)의 처 광산정씨(光山鄭氏)이고 1절은 그의 동생 경형(敬兄)이다. 이들은 1595년에 고경명과 경형, 종후, 인후가 정려되었으며, 1597년에는 노상룡의 처 고씨가 정려되었고, 1655년 부금이 정려되었으며, 1844년에 거후의 처 광산정씨가 포함되었다.충렬공(忠烈公) 고경명(1533∼1592년)은 압촌동에서 대사간(大司諫) 맹영(孟英)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제봉(霽俸),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명종 12년(155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1년 동래부사(東萊府使)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차남 의열공(義烈公) 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금산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아버지와 동생을 잃었다.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부르고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양산숙(梁山璹) 등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성이 무너지자 이들 의병장들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열녀는 그의 딸 영광 유생 노상룡의 처와 그의 질부인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로 이들은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붙잡히자 자결하여 절개를 지켰다. 그 외에 효자로 그의 손자인 선교랑(宣敎郞) 부금과 절의(節義)로 죽은 동생 경형 등 일가 7명이 모셔져 있다. 현존 건물은 1844년에 세운 것으로 사방에 홍살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차단하고 앞 뒤 2열로 정려현판(旌閭懸板)을 걸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붕은 부연(附緣)이 없는 홑처마로 처리했다. 건물 밖에는 담장을 돌리고 외삼문(外三門)을 세웠으며 삼강문 옆에는 고씨 문중의 제각인 추원각(追遠閣)이 있다.
관리자 16-12-27 조회1123
이 은행나무는 약 25m의 높이에 전체 둘레가 13m이다. 칠석동 옻돌마을 앞에 있으며, 나무에 돌을 쌓아 논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이 나무는 할머니당산으로 마을 앞 들판에 있는데 뒷산의 할아버지당산소나무과 함께 매년 정월대보름 전날 당산제를 지내는 곳으로 제가 끝나면 상ㆍ하촌(上ㆍ下村)으로 나누어 고싸움놀이를 한다. 죽령산 아래의 평야지대에 있는 칠석동은 풍수지리상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는데, 이 소의 고삐를 매어두기 위하여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관리자 16-12-27 조회1002
포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호남 지방에서 최초로 의병(義兵) 7천명을 모집하여 금산(錦山) 전투(戰鬪)에서 장렬히 순절한 고경명(高敬命),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 삼부자(三父子)와 유팽노(柳彭老), 안영(安瑛) 등 5위(五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액(賜額) 사당(祠堂)으로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書院撤廢) 때에도 장성(長成)의 필암서원(筆岩書院)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전남지방 이대서원(二大書院)중 하나이다. 임란(壬亂)이 끝나고 정국(政局)이 안정된 1601년 호남(湖南) 유생(儒生)들은 충절인물(忠節人物)을 모실 사우(祠宇) 건립을 청하고 광주(光州) 제봉산아래 사당을 건립했으며 이어 1603년에 박지효(朴之孝)와 후손들이 사액(賜額)을 청하여「포충(褒忠)」이란 액호(額號)를 받았다. 사우(詞宇) 내(內) 주벽(主壁)에 고경명(高敬命)을 제향(祭享)하고 동배위(東配位)에 고종후(高從厚), 유팽노(柳彭老), 서배위(西配位)에 고인후(高因厚), 안영(安瑛)을 배향(配享)했다.배향(配享) 인물(人物)의 행적(行跡)은 다음과 같다.① 고경명(高敬命)(1533∼1592) :자(字)는 이순(而順), 호(號는) 제봉(霽峰) 또는 태헌(苔軒)이며, 본관은 장흥으로 부제학(富提學) 맹영(孟英)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明宗) 7년)에 진사시(進士試), 1558년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된 후로 호조좌랑(戶曹佐郞),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역임했다. 한 때 벼슬을 떠났다가 다시 영암군수(靈巖郡守), 승정원판교(承政院判校),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한 후 1591년 벼슬을 떠나 고향에 쉬던 중 임란을 만나 예순의 고령(高齡)을 무릅쓰고 의병(義兵) 7천여명을 모아 선조(先祖)의 행궁(行宮)이 있던 평안도로 달려갔으나, 가는 도중에 금산(錦山)에서 마주친 왜군(倭軍)과 싸우다 전사(戰死)했다. 후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금산성곡서원(錦山星谷書院) 종용사(從容祠) 형창화산서원( 昌花山書院)에도 배향(配享)되었다. 저서(著書)에「제봉집(霽峰集)」, 「유서석록(遊瑞石錄)」이 있다.② 고종후(高從厚)(1544∼1593) :자(字)는 도중(道仲), 호(號)는 준봉( 峰)이고 고경명(高敬命)의 장남(長男)으로 1570년(선조 3년) 진사(進士)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내과(內科)로 급제 임피현령(臨陂縣令),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했다. 임란(壬亂) 때 금산전투(錦山戰鬪)에 참가했으나 아버지와 아우를 잃은 뒤 다시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에게 대항했으며, 1595년 진주성이 위태롭게 되자,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들과 함께 진주성 지키기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성은 함락되었고, 의분을 못이긴 고종후는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장렬한 최후를 하였다.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諡號)는 효열(孝烈)이다. 포충사(褒忠詞)와 진주(晋州) 장렬사에 제향(祭享)되었다.③ 고인후(高因厚)(1561∼1592) :자(字)는 선건(善健), 호(號)는 학봉(鶴峰)이며 고경명(高敬命)의 둘째 아들이다. 1577년 진사(進士)가 되고 1589년 증광내과(增廣內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고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지냈다. 임란 때 부형과 함께 금산 전투에서 순절했다. 후에 예조참의(禮曺參議)에 추증(追贈)되었고, 인조(仁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가증(加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의열(義烈)이다. 포충사와 금산(錦山) 종용사(從容祠)에 배향(配享)되었다.④ 유팽노(柳彭老)(1554∼1592) :자(字)는 군수(君壽), 호(號)는 월파(月坡), 본관(本貫)은 문화(文化)이며 유경안(柳景顔)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先祖)2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홍문정자(弘文正字),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지내다가 고향인 곡성(谷城) 옥과(玉果)에 내려와 있던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양대박(梁大樸), 안영(安映)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담양(潭陽)에서 고경명군(高敬命軍)과 합치고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했다. 후에 사간(司諫)에 추증되었다.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금산(錦山)의 종용사(從容祠)에도 제향(祭享)되었다.⑤ 안영(安映)(?∼1592) :자(字)는 원서(元瑞), 본관(本貫)은 순흥(順興)이며 교리(校理) 처순(處順)의 증손자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서울에 있는 어머니를 모시러 상경하다가 고경명(高敬命)의 의병군(義兵軍)에 가담하여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금산(錦山) 전투에서 고경명(高敬命)을 보좌하여 싸우다 전사했다. 후에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추증되었다. 남원의 충민사(忠愍祠)에도 제향(祭享)되어 있다.한편 포충사(褒忠詞)에는 충노(忠奴) 봉이(鳳伊), 귀인지비(貴仁之碑)가 옛 사우 입구(入口) 홍살문 옆의 자연석에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이들은 고경명(高敬命)의 가노(家奴)로서 의병(義兵)에 참가했는데, 금산(錦山)전투에서 고경명(高敬命)과 고인후(高因厚)부자가 전사하자 순절한 충의의 인물들이다.이 밖에 고경명(高敬命)장군의 유품인 친필(親筆) 마상격문(馬上檄文), 목판(木板)(493매(枚))들이 보존되고 있고, 신사우(新祠宇) 건립 때 정기관(正氣館)에 마련된 기록화(記錄畵) 3점이 있는데 「창의거병도(倡義擧兵圖)」(오승윤(吳承潤)그림), 「금산구국혈전도(錦山救國血戰圖)」(오승우(吳承雨)그림),「구국출병도(救國出兵圖)」(양인옥(梁寅鈺) 그림)등이다.
관리자 16-12-27 조회1779